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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75)]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②

[박도 기자]

▲  박정희 박근혜 부녀
ⓒ 대한민국 정부

박근혜의 행적

2020년 한국에 살고 있는 60대 이상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대한민국 여성 중 가장 많이 들어본 이름을 꼽으라면 육영수 여사와 영애 박근혜일 듯하다.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경축식장에서 서거했다. 그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귀에 익은 여성 이름은 아마도 박근혜일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에서부터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으로 재임 중 탄핵으로 물러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수많은 추종자들이 피켓을 들고 교도소 밖에서도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현실이다.파워볼실시간

앞선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남의 시선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건 한편으로는 독이 되기에 박복하다. 그래서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도 생겨났나 보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양친 모두 비명에 잃고, 훗날 대통령이 돼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부녀 대통령, 게다가 헌정 이후 최초로 탄핵된 불명예를 안은 대통령은 앞으로도 좀처럼 나오기 힘들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적을 기록해본다.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군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서울 신당동에 집을 마련할 때까지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 자주 이사 다녔다. 첫돌 무렵에는 전남 광주시 동명동 셋방에서 살았으며, 1953년 여름에는 서울 동숭동으로, 다시 이듬해에는 광주로 내려가 1955년 7월 아버지가 사단장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말씨는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섞인 서울 말씨였다. 이는 충청도 옥천 출신의 어머니 육영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아홉 살이던 1961년 5월 15일 밤, 아버지 박정희가 5.16 거사를 위해 집을 나서는데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고 가세요”라면서 가족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마련했다. 육영수는 그날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기에 그렇게 말했을 듯하다. 그러자 박정희는 묶던 군화 끈을 풀고 근혜 방에 가서 격려해주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 이튿날 새벽 쿠데타의 성공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박근혜는 대통령 딸 영애로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자랐다.성심여자중학교 2학년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불교에도 심취했다. 대통령 영애였지만 학교 동창생들에게 비친 그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검소하며 촌스러운 엄친딸’로 기억됐다고 한다. 이는 부모의 가정교육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치마 길이는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고, 도시락에는 보리쌀 밥에 멸치볶음, 달걀부침이 주된 메뉴였다고 한다.

▲  육영수 영부인 운명 장면
ⓒ 자료사진

첫 번째 시련

1967년 서울 성심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재단의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자원이 빈약한 대한민국이 장차 먹고살 거리는 전자공업이라고, 1970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서강대 이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유학 중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기념식장에서 어머니 육영수의 피격 소식에 급히 귀국하던 중 신문기사를 통해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들었다. 그때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6일 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로 참석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지냈고, 전국의 학교를 돌면서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나는 아버지를 보필하는 일에 주력했다. 아버지가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했다.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 박근혜 지음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중

그 무렵 박근혜는 청와대 안주인으로, 퍼스트레이디로, 그리고 사회봉사자로 1인 3역을 소화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  아버지 영정 앞에 분향하는 박근혜.
ⓒ 자료사진

두 번째 시련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잠결에 긴 전화벨이 울렸다. 단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받자 가라앉은 비서관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일어나 몸단장을 해주십시오.”그 순간 박근혜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5년 전의 악몽이 스쳤다. 아버지가 저격을 당한 것이었다. 양친 부모를 모두 총탄으로 잃는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인 1979년 11월 21일 박근혜 형제자매는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옛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인생 만사 무상함을 또 한 번 느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그들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한결 같은 경우가 그야말로 드물었다.

모두가 변하고 변하여, 그때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배신을 하고 이러저러하게 변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의 내 주변도 몇 년 후 어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박근혜 지음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1991년 2월 10일 일기 중

이 시기 그는 인간에 대한 배신과 그로 인한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으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세파를 겪지 않은 이로써 보는 안일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은둔생활로 18년 동안의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은둔, 정치인, 선거의 여왕, 그리고 대통령

▲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유성호

1997년의 IMF 위기 당시 박근혜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놨다. TV 찬조출연 이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유권자들의 박정희 향수가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듬해 4월 대구 달서지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해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 후보를 가볍게 제치고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차떼기 당’이란 오명으로 난파 직전의 한나라당 당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를 꾸려가며 당을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그뿐 아니라 여러 번의 재선거와 보궐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다. 그리하여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마침내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51%의 득표율과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하며 대통령에 당선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2월 25일에 출범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나머지 임기 약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불명예로 끝났다. 그가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나는 ‘과연 그가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할지’ 많이 염려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사회적 약자 계층을 잘 보살피길 기대했다.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 집권 18년 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유족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며,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 국민대화합을 이루기 바랐다.

하지만 출발부터 내 기대는 사라졌다.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지역감정을 조작한 이, 유신헌법을 만들고 공안을 조작했던 이였다. 박근혜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 살았던 옛 집으로, 그는 재임 중 대통령이라기보다 ‘유신 공주’로 ‘퍼스트레이디’로 사저처럼 안일하게 지냈다.2014년 연두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대국민 연설을 하고도 전임 대통령들이 애써 만든 개성공단을 단박에 폐쇄, 다시 냉전시대로 돌려놨다. 2014년 4월 16일 승객 300여 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때 그의 행적은 애매모호해 시민들을 격노케 했다. 대한민국 국정을 아무런 직책도 없는 한 민간인의 농간으로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에 대다수 시민들은 참담함을 금할 수 없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  2008년 3월 23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공천을 “한마디로 정당정치를 뒤로 후퇴시킨 무원칙한 공천의 결정체”라며 “대표와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모습.
ⓒ 이종호

 그의 임기 중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항간에 나돌 때 난 ’21세기 민주국가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 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리스트에 내 이름도 나오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부활해 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 비판은 자동차의 제어장치와 같은 것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얼마나 위험한가. 그 결과 박근혜 정부는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벼랑에서 추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이번 박근혜 편을 쓰면서 많은 생각과 쓸 거리를 머릿속에 준비해 뒀다. 하지만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금도에도 어긋나는 것 같아 후일 후배작가에게 미루면서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1회 기사가 뜨자 많은 독자들이 댓글을 달아주고, 메일로 전화로 제보해 주셨다. 한 독자는 “이 세상에 단 셋 남은 혈육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이가 무슨 대통령이냐”고 그에게 꼬박 속아 표를 준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아직도 그의 주변을 맴도는 태극기 부대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 나도 태극기 부대에 대한 비판의식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까지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아직도 우리 시민들이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2008년 총선을 앞두고 친이명박계가 친박근혜계에 대한 공천 배제를 전방위적으로 가했을 때 박근혜가 한 말이다. 이 말 한 마디로 박근혜 대통령 편을 아우른다. 

▲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17일 오전 37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호송차를 타고 도착한 뒤 법정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이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모두 마칩니다. 다음 회는 ‘연재를 마치면서’라는 기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국무부, 관련 질의에 평소보다 신속 반응..추가적 상황악화 방지에 긍정 평가
전날도 직접적 북한 비난 대신 한국대응 지지..대북 자극 피하려는 의도 관측

미 국무부 로고 [국무부 홈페이지 캡처]
미 국무부 로고 [국무부 홈페이지 캡처]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미국 국무부는 25일(현지시간) 남측 공무원 사살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와 관련해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평가했다.파워볼사이트

김 위원장의 이례적 공개 사과를 통해 추가적 상황악화를 막게 된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평소보다 신속하게 국무부 입장을 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연합뉴스의 서면 질의에 “살해된 한국 공무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답했다.

이어 “우리는 이번 일에 대한 동맹 한국의 규탄과 북한의 완전한 해명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완전히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이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이 한국에 사과와 설명을 한 것을 안다”며 “이는 도움 되는 조치”라고 부연했다.

이날 국무부 반응은 미국 동부 현지시간으로 오전 10시가 되기 전에 나왔다. 관련 질의에 주로 오후에 답변이 나오는 것에 비하면 신속한 것이다.

국무부가 김 위원장의 사과에 대해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평가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북한의 남측 공무원 사살이라는 중대 사안으로 가뜩이나 얼어붙은 남북관계가 한층 악화돼 북미관계까지 여파가 있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사과를 통해 추가적 상황 악화를 막게 된 데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해석된다.

국무부는 전날 이번 사건에 대한 첫 반응을 내놓으면서도 ‘동맹 한국의 규탄과 북한의 완전한 해명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완전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직접적 대북 비난을 하지 않고 한국의 대응을 지지하는 우회적 방식을 선택, 북한에 대한 자극을 피하려는 의도라는 관측을 낳았다.

11월 대선까지 최소한 북한의 대미압박 행보에 따른 상황 악화를 막겠다는 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에 맞춰 무력시위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한다.

김 위원장은 이날 남측에 통지문을 보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앞서 군 당국은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선 공무원인 47세 남성이 실종 신고 접수 하루 뒤인 22일 서해상에서 북한 선박에 발견됐으며 북한군은 사살 후 시신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nari@yna.co.kr

“그간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하여 존재해온 세력이 끊임없이 민족을 이간시키고, 외세에 동조하면서 쌓아온 불신이 이번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달 2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걸어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달 2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걸어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독립운동가와 후손, 유족들이 구성한 단체인 광복회는 25일 북한이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사살한 사건과 관련, 친일세력의 행태가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란 해석을 내놨다.파워볼실시간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최근 월북자 피살사건은 전 국민과 함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번 불행은 해방 후 누적된 남북 불신과 적대의 산물이기도 하다”며 “그간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하여 존재해온 세력이 끊임없이 민족을 이간시키고, 외세에 동조하면서 쌓아온 불신이 이번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나라는 외세에 의한 분단에 편승한 세력이 권력을 잡고 동포끼리 총칼을 겨누고 싸우는 나라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적대와 불안의 시대를 종식하고 우리 민족끼리 오순도순 평화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데 우리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힘을 모아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에 관해선 “이번 사건으로 국민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다’는 사과와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고 평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화성연쇄살인 ‘가짜 범인’ 윤성여씨

윤성여(53)씨는 다리를 절면서 걸어왔다. 키는 160㎝ 초반쯤 되려나. 왼손은 바지에 넣은 채, 오른손으로 악수를 건넸다. “세 살 때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왼손으로 왼쪽 다리를 잡아주지 않으면 앞으로 쏠려 넘어진다”고 했다.

그는 억울하게 20년 옥살이를 한 피해자다. 1980년대 후반 ‘화성연쇄살인’의 여덟 번째 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에서 여중생(당시 나이 13세)이 살해됐는데, 1여년 뒤 경찰은 윤씨를 범인으로 ‘찍어’ 감옥으로 보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무죄’라고 외쳤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년 동안 세상과 격리돼 있다가 2009년 가석방으로 충북 청주교도소에서 풀려나왔다. 그래도 ‘살인범’ ‘무기수’라는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지난해 9월 윤씨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DNA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진짜 범인’이 잡힌 것이다. 진범의 이름은 ‘이춘재’. “따지고 보면 이춘재는 제가 어릴 적 살았던 동네(화성 태안읍 병점)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던 3년 선배입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정말 왜 그랬는지, 법정에서 물을 겁니다.”

현재 수원지법 형사2부는 윤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윤씨는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30년 전 그에게 무기징역을 처음 선고한 재판부도 수원지법 형사2부다. 같은 사건의 피고인을 두고 같은 재판부가 정반대 판단을 내리게 되는 상황이다. 윤씨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청주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11일,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공원에서 만난 윤성여씨 모습.
지난 11일, 충북 청주시 서원구의 한 공원에서 만난 윤성여씨 모습.

◇”보상금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는 자동차 시트 제작 공장에서 무게 수십㎏의 원단을 옮기는 일을 한다. 19년 가까이 그가 갇혀 있던 청주교도소에서 집이 불과 5분 거리(약 2㎞)에 있다. ‘교도소’라는 세 글자 외에는 청주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했다.

–왜 청주를 벗어나지 않나요.

“여기에 출소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시설이 있는데, 1~2년 정도 적응하다가 사회로 나가요. 밖에서 누가 저를 반겨주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청주에 눌러앉게 됐어요.”

–재심 재판을 들어가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저는 변호인석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재판 5번에서 경찰관 3명이 나와서 진술을 했는데요, 진실을 말하진 않는 거 같습니다. ‘나는 잘 모른다. 저 사람이 했다’는 식입니다. 저는 속에서 화가 끓어 오르죠. 옆에 앉아 있는 변호사님이 제 허벅지를 누르곤 합니다. 참으라는 거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성폭행 살인범으로 몰렸습니다.

“저는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후반에 경찰이 범죄자 하나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죠. 만약 제가 ‘그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끝까지 버티면, 아마 사형당해 지금 이 자리에 없을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도 못 마치고, 공장에서 일했는데요, 내가 만만해 보여서 경찰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용의자로 지목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경찰은 소아마비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제가 피해자 집 담을 뛰어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나요.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경기 안성 친척집에 있다가 화성으로 왔습니다. 10여년 동안 트랙터나 경운기 같은 농기구를 수리하는 일을 배워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이춘재가 저지른 7차 사건 이후, 동네가 정말 어수선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일하는 농기구 센터에 경찰이 거의 매일 오다시피 했습니다. 센터에 저를 포함해 3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의아해서 ‘왜 매일 같이 오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타주시는 커피가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줄로만 알았죠. 나중에 알고 보니 매일 우리를 감시했던 겁니다. 센터 건너편에 3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를 24시간 주시했다고 하더군요.”

지난 7일, 재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윤씨가 수원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7일, 재심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윤씨가 수원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체포되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1989년 5~6월인가, 하루는 형사가 신분증을 달라더니, 갑자기 공갈 협박을 하면서 체모를 뽑아달라고 했어요. 모두 합쳐 일곱 번쯤 뽑아갔습니다. 1989년 7월 어느 날(25일) 저녁에 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는데, ‘착’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내려오는 게 보였는데, 수갑이었죠. 경찰이 내 손목을 묶더군요. 조사받는 과정에서 형사들이 저를 보고 뭐가 나왔다면서 ‘니가 범인이다’라고 했습니다. ‘난 아니다’라고 했지만, 주먹으로 제 뺨을 때렸고, 쪼그려 뛰기도 시켰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하니까, ‘저 새끼 물주지 마’라고 했고요. 그렇게 사흘간 잠을 못 잤습니다.”

–끝까지 부인하지 않았나요.

“기자님은 꼬박 사흘 동안 잠을 안 자본 적이 있나요. 사람이 사흘 동안 잠을 안 자면, 나중에 자기가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을 못 합니다. 지금도 그 며칠 동안 뭘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거예요. 이후에 계속 무죄를 주장했지만,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제가 돈이 있나요, ‘빽’이 있나요.”

–진인 이춘재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소식 들었을 때 ‘제발 8차 사건만 피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죠. 그런데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는 게 진짜 내 심정이었습니다. ‘8차 사건’이 다시 이슈화가 되면, 나와 내 가족들이 또 시달릴 테니까요. 30여년간 하도 시달려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가능성이 큰데요.

“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100억원을, 1000억원을 준다 한들 내 인생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만약 기자님한테 ’20억 줄 테니 감옥에서 20년 살아라’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보상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게 싫습니다.”

지난해 11월 수원지방법원에 재심 신청하러 가는 윤성여씨, 당시 그는 신분이 완전 공개되지 않아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지난해 11월 수원지방법원에 재심 신청하러 가는 윤성여씨, 당시 그는 신분이 완전 공개되지 않아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중학교 검정고시 도전할 것”

윤씨는 미혼이다. 누나와 여동생 등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다. 교도소에서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해 최종 학력은 ‘초졸’이다. 재심을 맡은 법원이 지난 7일 마지막 증인으로 이춘재를 소환해 신문하기로 결정하면서, 올해 11월 그는 이춘재를 처음 맞닥뜨릴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를 보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요.

“그 당시에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물어야죠. 한편으로는 이춘재에게 복잡한 감정도 있습니다. 이춘재가 이번에 자백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는 살인범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 어릴 적 살던 동네(화성 병점) 근처에서 이춘재가 살았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춘재 동생이 있는데, 당시 우리 동네 살았던 분들이 말하기를 제가 이춘재 동생을 본 적이 있을 거고, 이춘재 동생도 저를 안다고 했다더군요.”

–교도소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 3년은 정말 적응이 안 됐어요. ‘도대체 내가 여기 왜 와 있나’ ‘내가 왜 여기 살아야 하나’ 같은 생각 때문이었죠. 그런데 교도소에 오래 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기 치다 잡힌 대학 교수처럼 꽤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있죠. ‘시대는 변할 것이고, 그럼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이 얘기해줬습니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생각은 했나요.

“아뇨. 못했습니다. 제가 교도소 안에 있을 때 몇 번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그때마다 교도소 관계자들은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재심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오고 나서 변호사를 찾아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해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윤씨는 현재 청주에 있는 자동차 시트 제작 공장에서 일한다.
윤씨는 현재 청주에 있는 자동차 시트 제작 공장에서 일한다.

–20년 만에 가석방으로 결국 나왔습니다. 바깥세상이 좋던가요.

“2009년에 풀려났을 때 저는 여전히 1980년대 후반을 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하루하루가 쳇바퀴처럼 돌아갈 뿐,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기 때문이죠. 감옥에서 나온 뒤 동생과 대형마트를 갔는데, 뭐를 사야 하고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시대에 적응하는 게 힘듭니다. 교도소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거죠.”

–남은 인생에서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우선은 이 재판(재심) 홀가분하게 털고 가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고 나서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제 나이에 대학은 어렵지 않을까요. 결혼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네요.”

윤씨는 무죄가 확정될 경우 국가에서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은 보상금을 20억~30억원 규모로 추측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그가 작심한듯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상금을 받게 되면 불나방처럼 누군가 달려들겠죠. 그러면 그 사람을 잘라버릴 겁니다.”

[뉴스엔 지연주 기자]

웹툰작가 겸 방송인 기안84가 바뀐 집 내부를 공개했다.

9월 25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기안84 집에 방문한 이시언의 모습이 담겼다.

이시언은 기안84의 집에 방문했다. 이시언은 한층 말끔해진 기안84의 집을 보고 놀라워했다. 기안84는 “소파도 큰 걸로 바꿨다. 운동기구 대신 안마의자를 놨다. 냉장고도 구입했다”고 설명했다. 기안84는 인테리어를 바꾼 이유에 대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살지? 바꿔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기안84는 이시언에게 “마감이 아직 안 끝났다. 분리수거 좀 해달라”라고 부탁했다. 이시언은 군말 없이 기안84 집안일을 해줬다. (사진=MBC ‘나 혼자 산다’ 캡처)

뉴스엔 지연주 pl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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